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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오아트 Report no.189] July Week 1

HELIO REPORT 헬리오 리포트/2023

by HelioArt 2023. 8. 2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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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초현실주의 작가 '달리'의 삶과 예술

Salvador Dalí,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현실주의(Surrealism)'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를 떠올리고, 머릿속에 그의 연극적인 행동거지와 콧수염 그리고 녹아내리고 있는 시계를 그려보게 된다. '달리'는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이지만 동시에 익살스러운 행동으로도 유명했는데, 이는 그의 예술에 대한 진지함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 파시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초현실주의자 모임에서 파문당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달리'는 20세기 서양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번 리포트를 통해 그가 생전 밟아온 길을 따라가보자.


어린 시절

Salvador Dalí, Portrait of My Dead Brother, 1963.

리'('Salvador Dali')는 1904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피게레스(Figueres)'에서 태어났다. '달리'의 아버지는 규율에 엄격한 변호사였던 반면 어머니는 그의 예술적 야망을 격려했다. '달리'가 태어나기 9개월 전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라는 동일한 이름을 먼저 가지고 태어났던 형이 사망했다.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에게 들었던 '달리'는 1963년에 작품 "나의 죽은 형제의 초상"("Portrait of My Dead Brother")을 그리기도 했다.


학업과 초기 이력

Salvador Dalí, Self-Portrait with Raphaelesque Neck, 1921-1922.

리'는 피게레스의 '시립 드로잉 학교(Municipal Drawing School)'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며 아방가르드를 처음 접했다. 이후 스페인 명문 예술학교인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에 입학한 '달리'의 예술은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달리의 나이는 17세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라파엘 풍의 목이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the Raphaelesque Neck")과 "소녀의 등"("Girl's Back")이 있다.

리'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이론을 예술에 적용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 욕망 그리고 신경증을 전달하고자 했다. 미술과 정신분석학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두 사람 '달리'와 '프로이트'는 1938년 런던에서 만나기도 했다.


달리와 초현실주의 모임

Salvador Dalí, Apparatus and Hand, 1927.

랑스 파리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읽은 '달리'는 파리로 이주해 초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호안 미로'('Joan Miro')를 만났다. '미로'는 '달리'를 미술평론가 '브르통'과 '피카소'('Pablo Picasso') 그리고 자신의 갤러리 딜러에게 소개했다.

리'는 '이브 탕기'('Yves Tanguy')와 같은 초현실주의 운동에 먼저 가담한 선배들의 아이디어를 빠르게 흡수했다. 머지않아 그는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시기에 '달리'가 그린 첫번째 초현실주의 작품인 "기관과 손"("Apparatus and Hand")은 기하학적인 입체 위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길죽하면서도 기괴한 존재를 묘사한다. '달리'는 이것이 자신의 잠재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출현한 존재라고 말했다.


달리와 부뉴엘

Salvador Dalí and Luis Buñuel, still from Un Chien Andalou, 1929.

리는 1929년 스페인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과 함께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는 분절된 미쟝센과 도발적인 이미지들의 몽타주를 특징으로 한다. 이 영화는 충격적인 장면들 때문에 추문이 된 동시에 영화사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자리잡게 되었다.


달리와 갈라

Gala Dalí, c. 1930.

리는 1929년 여름, 초현실주의의 공동 창시자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와 그의 아내 '갈라'를 만났고 곧 불륜을 시작했다. '갈라'는 '엘뤼아르' 이전에 독일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를 만나기도 했다. '갈라'와 '달리'는 결혼했고 평생의 동반자로 살아갔다.


초현실주의 오브제

Salvador Dalí, Lobster Telephone, 1938.

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시각적 기법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사물 미학을 기반으로 '초현실주의 오브제'라는 모티브를 제안한 달리는 이것이 억압된 생각과 감정을 끌어올린다고 주장했다. 특히 "랍스터 전화기"("Lobster Telephone")는 사물 미학과 '초현실주의 오브제'에 대한 '달리'의 집착을 물질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편집증-비판

Salvador Dali, Apparition of Face and Fruit Dish on a Beach, 1938

리'는 편집증에 비판적인 예술의 방법론을 제안했다. 편집증 환자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믿은 '달리'는 자신의 신념에 기초하여, 작품 안에 유령의 형상을 숨기는 등 관람자의 의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과 "해변에 나타난 얼굴과 과일 그릇의 환영"("Apparition of Face and Fruit Dish on a Beach")이 있다.


명성과 재산

Salvador Dalí on the deck of the S.S. Normandie as it docks in New York City, 1936.

시 아방가르드에 가담했던 예술가들은 보편적으로 돈과 명성에 대한 갈망을 예술적 본질의 배반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단아였던 '달리'는 뻔뻔한 표정을 하고서는 자신은 "순수하고, 신비롭고 또 고딕적인 돈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며 동료들과는 어긋나는 행보를 보였다. '달리'는 파리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콜리플라워로 가득찬 롤스로이스를 타고 등장하는 등 공식석상에서 익살스러운 기행을 벌이곤 했다. 그의 독특한 언행은 언론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고 그가 부와 명성을 얻는 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명인사가 된 '달리'의 사진은 1936년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에서의 추방

리'는 파시즘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곤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달리'의 정치적 성향이 극우에 치우쳤던 것은 명백하다. 그는 스페인 내전 기간에 군사독재자였던 프랑코를 지지하고 나치의 히틀러에 열광하기도 했다. 1934년 '브르통'은 '달리'를 파시스트 재판에 회부함으로써 그를 초현실주의 모임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달리'는 자신의 혐의를 강력하게 부정했고 재판부 또한 '달리'가 본격적인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대전 발발 후 '달리'는 인종 전쟁을 지지한다는 비난을 받고 초현실주의 모임에서 추방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파문 이후 이력

Salvador Dalí, Dream Caused by the Flight of a Bee Around a Pomegranate a Second Before Waking, 1944

르통'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1960년 뉴욕에서 기획한 전시에서 '달리'를 배제하기 위해 몇년간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달리'의 명성은 예술가로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대중문화적인 현상이었기에 계속해서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모임에서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향수 브랜드 제품 라인을 발매하는 등 상업적 진출을 멈추지 않았다.


달리의 말년

년의 '달리'는 1980년 파킨슨병에 걸려 우울증과 약물 중독으로 건강을 잃어갔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평생의 동반자 '갈라'가 사망했고, 그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아내를 상실하고 그는 식사를 거부하는 일도 잦았던 그는 5년 후 자신의 고향인 피게레스에서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무덤은 어린 시절에 사망한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 ar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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